우리의 관계에 '합의'가 필요한 이유
한 때 '커뮤니티' IT 서비스가 한창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들 싫증이 난 모양이다. 취향관을 준비할 때는 그저 우리의 필요와 갈망에 의해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부대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험을 원하고 있음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심지어 페이스북에서는 잠깐의 스크롤링 사이에도 여럿의 클럽, 모임, 커뮤니티, 공간들에 대한 포스팅을 만나게 된다. 모임의 범람 속에서 이 또한 빨리 싫증나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과 함께 많아지고 잦아지는 만남에 대한 손짓들이 너무나도 반갑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취향관을 처음 기획하던 단계에서 '취향'보다도 먼저 손에 쥐었던 키워드는 '공동체'. 돌아보니 지금까지는 대부분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다. 가족, 학교, 직장 모두 이미 제 각각 정해진 목적과 체계가 있고 그 공동체에 속한 주체들은 정해진 역할과 체계 하에 목적의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 단지 그 뿐이 아니라 주어진, 정해진 공동체 안에서 멋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공동체란 무릇 사람들의 모여있음으로 인해 만들어지므로. 그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왠지 모르게 피로하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고민하게 된다. 점차 '혼자'의 삶이 회자되는 시대지만 결코 '혼자'일 수는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싶을까? 그렇게 좋은, 멋진 공동체에 대한 갈망으로 '취향의 공동체, 취향관'의 여정이 시작됐다.
목적이 불분명한 공동체
뚜렷한 목적과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에는 사람들이 쉽게 모여진다. 이 곳에서는 내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얻게 될지가 명확할수록 이해가 쉽고 동의가 되어 함께 하기로 결정하기가 쉽다. 이미 무엇을 '목적'한 바가 있으므로 모이기도 쉽지만, '목적'이 사라지면 떠나기도 세상 쉽다.
그런데 잠깐,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해본다. 무엇이 목적이었지? 그런데 다시, 꼭 어떤 목적이 있어야만 관계 맺을 수 있나? 그저 마음이 맞는, 대화가 즐거운, 좋은 영감을 받는 그런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이 대목에 꼭 다시 질문을 받는다. "그래, 알겠어.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뭘 하는데?" 목적을 두고 또 목적을 찾는다.
가오픈 기간 중 지난 한 달 간 취향관의 Bar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마담나잇'을 열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 껏 할 수 있고, 들어주는 자리다. 그날 취향관에 방문했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어떤 주제의 이야기가 나누어지는지 전혀 공지된 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무슨 대화를 나눌지도 모르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인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온 김에 이런 게 있다 하여 계획에도 없던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리 준비된 이야기는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ar가 가득 차다못해, 밖에선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둘러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 마담이 대화에 기름칠을 하기도, 때로 어떤 주제를 던지는 호스트를 초대하기도 한다. 세상 가장 뻘쭘할 것 같은데, 놀랍게도 마담나잇이 열리는 날이면 취향관은 어느 날보다도 멋진 공간이 된다. 그리고 어느 새 마담도 호스트도 사라지지만 대화는 뭉근히 계속된다.
가장 중요한 건, 어쩌면 목적이 아니라 합의
'마담나잇'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합의가 전제될 뿐, 주제도 목적도 뚜렷하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히 새로운 사람과 대화의 경험에 노출된다. 직업도, 나이도 모르지만 단 하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꺼이 대화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 그 단촐한 합의 만으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서로 읽었던 좋은 책을 추천하기도,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인생 철학을 이야기 하기도, 사회 문제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여느 목적을 달성한 사람보다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일상이다.
사실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무르는 우연으로 시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이미 많다. 하지만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합의가 없는 문화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도 쉽게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시도한다해도 되려 뻘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러한 '합의' 없이 운영되었던 가오픈 기간에 외국 문화에 익숙한 분들이 반가운 마음에 찾아오셔서 대뜸(?) 대화를 시작했다가 상처만 남은 날들도 꽤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충분히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취향의 공동체
취향관은 이번 주를 끝으로 가오픈을 종료하고, 4월부터 회원제 살롱이자 사교클럽의 공간으로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된다. 'Member Only'로 문을 여는 4월 1일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취향관의 문이 닫히게 되는 날이기도 할 것이다.
'인스타의 성지가 아닌, 토론의 토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위해 우리는 '취향관 멤버'라는 합의된 공동체를 향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미 충분히 멋진 존재인 우리들이 언제라도 만나 생각과 영감을 교환할 수 있는 합의의 울타리 안에서 '멤버'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 어떠한 목적을 좇지 않아도, 무언가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발하지 못 했던 당신이라는 존재가 빛나는 곳이길 바란다. 생전 처음 겪는 이 느슨한 공동체가 가장 편안한, 부담없는 그럼에도 본질적이고 실존적으로 일상의 행복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얼마 전 마담나잇을 마치고 남긴 인스타그램의 글귀가 용기를 준다면, 당신은 이미 취향관이라는 취향의 공동체와 함께다.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슬쩍 마음을 열어보세요. 오늘 밤처럼 저희가 도울게요!”